파리 퐁피두 센터(Centre Pompidou)가 한국 화단을 대표하는 세 작가 권영우, 박서보, 하종현의 작품을 영구 소장한다고 밝혔다.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과 함께 프랑스 3대 미술관으로 손꼽히는 퐁피두 센터의 근현대미술 컬렉션은 시각 예술, 사진, 뉴미디어, 영화, 디자인 등 다양한 장르를 아울러 12만여 점에 이르며, 이는 유럽 내 최대이자 뉴욕 현대미술관에 이은 세계 두 번째 규모다. 퐁피두에 소장된 작품들은 4, 5층의 상설 전시를 통해 관람객에게 선보인다.
퐁피두 센터는 권영우의 채색 한지 회화 2점, 박서보의 색채묘법 1점, 하종현의 접합 1점 등 총 4점을 소장한다. 세 작가는 한국 현대미술의 대표적인 흐름이자 성과로 평가받는 단색화(Dansaekhwa)를 대표하는 거장들이다. 퐁피두 센터의 단색화 작품 소장은 국제무대에서 한국미술의 위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해외 미술사적 맥락 속에서 단색화의 학문적 가치에 대한 심도 있는 고찰이 더욱 활발해질 것이라는 기대를 낳고 있다. 단색화는 1970년대 한국의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경험한 세대의 작가들이 각기 다른 고유한 평면에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전통적 그리기의 접근을 시도하며 혁신적인 미학 담론을 발전시켜왔다. 작가의 고유한 행위성과 촉각성 그리고 정신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단색화 작품들은 일종의 ‘수행(performance)’과도 같은 제작 방식에 바탕한다.

권영우(1926-2013)의 채색 한지 회화 2점 <Untitled>(1984)와 <Untitled>(1986)는 화면 전체를 일정하게 반복적인 패턴으로 채워가듯 구멍을 뚫고 선을 만들어 염료를 흘린 1980년대 대표작이다. 서양의 과슈와 동양의 먹으로 채색된 본 작품에는 종이의 찢긴 부분으로 물감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이처럼 한지에 물감이 스며드는 우연적 현상을 활용한 작업 방식은 한지의 재료적 물질성을 극대화시켜 보여준다.
권영우는 초기에 한국화의 기본 재료인 수묵으로 구상적 추상의 표현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업을 하다가 1962년을 전후하여 필묵을 버리고 한지(韓紙)를 작품제작의 본격적인 매체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그는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의 기본 행위를 배제하는 대신 주로 손톱을 이용하여 종이를 자르고, 찢고, 뚫고, 붙이는 행위 등을 통해 반복적인 행위와 종이의 물질성과 촉각성을 작업의 중심에 놓았다. 여러 겹으로 겹쳐진 한지의 섬세한 재질감을 강조하면서 작가는 종이 위에 만들어진 입체감과 리듬으로 조형성을 구성하였는데, 이는 동양화의 매체를 재조명하여 그 영역을 초월한 새로운 문법으로 평가된다. 권영우의 작품세계는 현재 도쿄 블럼앤포(Blum & Poe) 갤러리 개인전 《Kwon Young-woo》(5월 22일까지)를 통해서 회자되고 있으며, 올 연말 국제갤러리 서울점에서 개인전을 개최할 예정이다.

 

권영우(1926-2013)
<Untitled>
1984
Gouache, Chinese ink on Korean paper
259 x 162 cm
Courtesy of the artist’s estate and Kukje Gallery
이미지 제공: 국제갤러리

간결함과 단아함이 돋보이는 박서보(b.1931)의 <Ecriture No. 120103>(2012)은 한국의 고유한 정신성을 바탕으로 한 ‘후기묘법’ 연작이다. 풍부한 색감의 대비 혹은 조화가 강조되어 ‘색채묘법’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후기묘법’은 자연과의 합일을 통해 마음을 비워내고 수신을 일깨우는 행위를 지향한다.
박서보는 1950년대 문화적 불모지였던 한국미술에 추상미술을 소개했다. 1957년 한국 엥포르멜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현대미술가협회의 주요 멤버로 활동한 뒤, 1961년 세계청년화가 파리대회에 참가하여 추상표현주의 미학을 바탕으로 한 ‘원형질’ 시리즈를 전개했다. 1960년대 중반부터 ‘유전질’, ‘허상’ 연작을 발표하며 보다 발전된 추상표현주의를 선보인 데 이어 1970년대 이후 ‘묘법’을 통해 새로운 전환을 시도했다. 작가 스스로가 ‘손의 여행’으로 일컫는 ‘묘법’은 그의 회화의 정점을 이룬다는 평을 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쌓아오고 있다.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후기묘법’에서는 종이 대신 한지를 사용한 화면 안에 반복적인 선 긋는 행위를 통해 고도의 절제된 세계를 표현한다. 한편 박서보는 올 하반기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앞두고 있다. 지난 2019 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린 대규모 회고전 이후 박서보 예술 세계의 ‘현재’를 다시금 선보이는 자리다.

하종현(b.1935)의 접합 연작 <Conjunction 85-022>(1985)는 작가의 독창적인 작업 방식인 배압법(背押法)을 보여준다. 올이 굵은 마포 뒷면에 두터운 물감을 바르면서 앞면으로 배어 나온 걸쭉한 물감 알갱이들은 나이프나 붓, 나무 주걱과 같은 도구를 사용한 작가의 개입으로 다시 자유롭게 변주되고, 마침내 물질과 행위의 흔적이 결합된 결과물로 완성된다.
하종현은 전위 미술가 그룹인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를 결성한 1969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석고, 신문지, 각목, 로프, 나무상자 등 오브제를 중심으로 한 ‘물성 탐구의 기간’을 거쳤다. 이 시기에 마대자루를 비롯해 밀가루, 신문, 용수철, 철조망 등 비(非)미술적이고 비(非)전통적 매체로 캔버스의 양면을 모두 활용하는 실험적인 작업방식이 시도됐다. 하종현은 “무엇이 그려지고 있는지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며 묘사하는 행위나 대상보다 매체의 물리적 특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하종현의 예술적 시도는 접합 초기작 <Conjunction 74-26>(1974)을 소장한 뉴욕 현대미술관의 소장품전 《Collection 1940s–1970s》에서도 조명되고 있으며, 뉴욕 티나 킴 갤러리(Tina Kim Gallery)에서는 하종현의 개인전을 6월 30일까지 진행한다.

국제갤러리는 그간 권영우, 박서보, 하종현, 이우환 등 단색화 작가들을 세계 미술계에 적극적으로 소개해왔다.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는 공식 병행전시인 《단색화》 특별전을 통해 유수의 작가들을 소개하고 그들의 미술사적 기여도를 기념하는 자리를 가진 바 있으며, 2016년에는 벨기에 브뤼셀의 보고시안 재단과 협력하여 《과정이 형태가 될 때: 단색화와 한국 추상미술》 특별전을 개최했다. 이 기념비적인 전시들은 곧 단색화 열풍을 이끌며 한국 미술사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2018년에는 상하이 소재의 파워롱미술관에서 한국 추상미술을 대규모로 소개하는 중국 내 최초의 전시 《한국의 추상미술: 김환기와 단색화》를 개최해 국제적으로 단색화의 미학과 가치에 대한 담론을 형성했다.

한편 국제갤러리는 5월 19일부터 시작된 ‘제9회 아트 바젤 홍콩’에서 이우환의 단독 부스를 오프라인 행사에서 선보이는 한편 온라인 뷰잉룸(OVR) 행사를 통해 박서보와 하종현의 작품을 집중 조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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