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EAN-MICHEL BASQUIAT: Royalty, Heroism, and the Streets

 전시 일정 : 2020.10. 8 (목) – 2021. 2. 7 (일)

 

롯데뮤지엄은 중첩된 상징과 은유를 통해 시대의 억압에 저항하는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보여주는 《장 미쉘 바스키아 •거리, 영웅, 예술》 전을 10월 8일(목)부터 2021년 2월 7(일)까지 개최한다. 1980년대 초 뉴욕 화단에 혜성처럼 나타난 바스키아는 생을 마감하기까지 8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3,0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바스키아는 자유와 사회에 대한 저항의 에너지로 점철된 다양한 작품을 통해 20세기 시각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번 전시는 어린아이와 같은 자유분방한 화법을 구현하는 동시에, 이질적이고 거친 이미지가 혼재된 독특한 작품으로 전 세계의 사랑을 받는 바스키아의 주요 작품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전시는 ‘거리’, ‘영웅’, ‘예술’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바스키아의 예술세계 전반을 조망하는 회화, 조각, 드로잉, 세라믹 그리고 사진 작품 등 150 여점을 선보인다. 먼저, 뉴욕 거리에서 시작된 SAMO© (세이모)시기를 기록한 사진 작품을 중심으로 바스키아의 초창기 예술세계를 살펴볼 것이다. 이어서 창조한 영웅의 다양한 도상과 초상화를 통해서 삶과 죽음, 폭력과 공포, 빛과 어두움이 투영된 시대상과 인간 내면의 원초적 모습을 함께 돌아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작 방식이자 구성요소인 텍스트와 드로잉, 콜라주와 제록스 기법이 혼합된 작품들을 통해서, 함축적 은유와 상징으로 점철된 이미지들이 생성되는 과정뿐 아니라 앤디 워홀과 함께한 대형 작품을 전시해 서로 다른 두 거장이 교류하며 새롭게 발전시켜 나간 예술세계를 감상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시작과 동시에 최고의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른, 장 미쉘 바스키아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수수께끼처럼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다. 바스키아는 산업화로 인해 변화된 제작 방식과 대중문화의 다양한 이미지를 즉흥적이면서도 감각적으로 조합하여, 시각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보일 듯 말 듯 써 내려간 텍스트와 서로 대립하는 이미지들이 동등한 구조로 배치된 바스키아의 작품은, 논리적인 사고의 틀을 전복시켜 기존의 가치를 뒤흔드는 새로운 차원의 문맥을 형성했다. 이번 전시는 만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보는 것에 대한 새로운 방식을 창조함으로써, 현재까지도 삶의 부조리한 가치에 의문을 던지며 삶과 예술의 경계에서 누구보다 긴 여운을 남긴 바스키아의 예술 세계를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순간을 선사할 것이다.

 

작가소개

 

장 미쉘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b. 1960-1988)

 

 

Henry Geldzahler : What is the subject matter of your work?

Jean-Michel Basquiat : Royalty, Heroism, and the Streets

 

– 1983, Interview with Henry Geldzahler

 

장 미쉘 바스키아

장 미쉘 바스키아는 1960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아이티공화국(Republic of Haiti)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Puerto Rico)계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어가 모국어였던 아버지와 스페인어 를 쓰는 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바스키아는 영어와 프랑스어, 스페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었고, 이것은 그의 작품 속에 다양한 언어를 표현하는 초석이 된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 바스키아를 데리고 뉴욕의 주요 미술관을 함께 다녔다. 이를 통해 바스키아는 다빈치(Leonardo da Vinci)부터 피카소(Pablo Picasso)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명화룰 감상하며 미술사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쌓을 수 있었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해부학적인 인체 모습과 내장 기관들, 강조된 팔과 다리의 형태는 7세 때 당했던 사고와 연관된다. 바스키아는 1968년 큰 교통사고로 팔이 부러지고 내장을 심하게 다쳐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비장을 떼어내는 큰 수술로 장기간 병원에 머물렀던 바스키아는 어머니가 선물한 해부학 입문서 『그레이의 해부학 Gray’s Anatomy』을 통해 해부학적 형상에 관심을 두게 된다. 이후 바스키아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해부학 드로잉을 보면서 사고를 발전시켰고 이러한 지식은 그의 내면에 자리한 삶과 죽음에 대한 사유와 연결되면서 뼈와 해골, 신체 기관이 그대로 노출되는 독창적인 도상으로 나타난다.

 

1977년부터 바스키아는 친구 알 디아즈(Al Diaz)와 함께 ‘흔해 빠진 낡은 것(SAMe Old shit)’이라는 뜻을 담은 ‘SAMO© (세이모)’를 만들어 거리 곳곳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시작한다. 1978년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하던 바스키아는 브루클린과 소호 거리 여기저기에 저작권 기호를 접목한 ‘SAMO©’와 함께 물질만능주의와 권위적인 사회를 비판하는 메시지를 남겨 새로운 미술 형태를 보여주고자 했다. 이런 SAMO©는 당시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고, 백인들로 뒤덮인 소호 지역의 갤러리들은 그들의 색다른 행보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바스키아는 1978년 말부터 불거진 활동에 대한 입장차이로 알 디아즈와 결별했으나, SAMO©라는 글자는 바스키아의 작품에서 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자리 잡는다.

 

 

[New York, New York] _ 1981년 작품

자동차나 비행기 그리고 도식적인 얼굴 모습을 자유롭고  무질서한 드로잉과  단어들이 뒤섞여 작품내면의  긴장감을 폭발시켜 무한안  상상력을 자극한다. 바스키아의 작품들은 그래피티의 자유로움 과 저항 정신이 담긴 새로운 회화의 탄생을 예고했다. 뉴욕의 번잡한 거리를 묘사한 이 작품에는 흰색과 검은색으로 거칠게 표현된 건물들 사이로 왕관 형태와 얼굴, 그리고 암호같은 글자들이 캔버스를 가득 메우고 있다.

 

 

우편 엽서와 티셔츠에 그림을 그려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던 바스키아는 당시 예술가들의 집결지였던 클럽 57(Club 57)과 머드 클럽(Mudd Club)에서 활동하면서 영화제작자이자 음악가, 큐레이터인 디에고 코르테즈(Diego Cortez)를 만난다. 바스키아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코르테즈는 그의 작품을 다량으로 구입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그의 소개로 바스키아는 1980년 제니 홀저(Jenny Holzer), 케니 샤프(Kenny Scharf), 키키 스미스(Kiki Smith) 등이 참여한 대규모 그룹전 《더 타임스 스퀘어 쇼 The Times Square Show》와 1981년 뉴욕 PS1의 《뉴욕/뉴 웨이브 New York/New Wave》에 참여하게 되었고,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품을 대외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119명의 미술가가 1,600점 이상을 출품한 《뉴욕/뉴 웨이브》 전시에서 바스키아는 자동차, 비행기, 도식적인 해골, 해부학적 인체 형상과 알 수 없는 문자들이 공존하는 15점을 출품했다. 같은 해 바스키아는 스위스 갤러리스트 브루노 비쇼프버거(Bruno Bischofberger)를 만나 이탈리아에서 개인전을 개최한다.

 

 

 

[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 _1981년 작품


1981년도 작품 <더  필드 넥스트 투 디 아더 로드The Field Next to the Other Road>는 바스키아의 첫 개인전 《세이모 SAMO》에 출품 된 초기 작품 중 하나이다. 1981년 제작된 작품 중 가장 큰 그림으로 페인트를 겹겹히 칠하고 아크릴, 오일 스틱, 스프레이 페인트와 같은 다양한 재료를 사용하여 완전한 인체의 사람을 구현한다. 작품은 인체를 표현한 바스키아 초기 작품의 특징을 볼 수 있는 대표작이다. 거대한 화면 속에는 뼈가 고스란히 드러나 보이는 형상의 인간이 소를 끌고 가고 있으며 앙상한 인간과 달리 끌려가는 소는 풍성하게 표현되어 있다. 동물의 죽음을 통해서 자본주의 소비 사회를 비판해온 바스키아는 인간과 동물을 극적으로 대비시켜 거대한 화면에 배치 했다. 이 작품에서 바스키아의 강렬한 주제였던 죽음은 죽을 운명에 처한 연약한 동물의 모습으로 더욱 극대화되며 누군가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이후 아니나 노세이 (Annina Nosei)의 지원으로 작업실을 얻게 된 바스키아는 1982년 아니나 노세이 갤러리에서 미국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언더그라운드 낙서미술가에서 미국 화단의 떠오르는 신인 아티스트로 급부상한다. 같은 해 래리 가고시안(Larry Gagosian)의 초대로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개인전에서 하루 만에 모든 작품이 팔려나갔고, 유럽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 중 하나인 《카셀 도큐멘타 7 Kassel Documenta 7》에 작품을 출품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쌓아 나갔다.

브루노 비쇼프버거의 소개로 바스키아가 그토록 바랐던 앤디 워홀(Andy Warhol)과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바스키아는 워홀을 의지하고 존경했으며 워홀에게 바스키아의 젊은 에너지는 새로운 예술적 동력이 되었다. 1983년 바스키아는 휘트니 비엔날레에 참여했으며 같은 해 비쇼프버거의 제안으로 프란체스코 클레멘테(Francesco Clemente), 워홀과 협업한 전시를 개최한다. 이후, 1985년 워홀과 함께한 전시가 미술계의 혹평을 받으면서 워홀과의 공동작업은 막을 내리게 된다. 지속적으로 아프리카계 영웅들을 그려왔던 바스키아는 1986년 단순한 관심을 넘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깊은 고찰로써 코트디부아르 공화국(République of Côte d’Ivoire)에서의 전시를 개최한다.

 

1987년 아버지와도 같았던 앤디 워홀이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큰 충격을 받는다. 바스키아는 삶에 대한 의지를 내려놓고 그와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과도 연락을 끊은 채 코트디부아르의 아비장(Abidjan)으로 이주할 결심을 한다. 그러나 바스키아는 이주를 엿새 앞둔 8월 12일 약물 과다로 유명을 달리한다. ‘거리의 이단아’에서 ‘세계 화단의 유망주’로 하루아침에 스타가 된 바스키아는 8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3,000여 점이 넘는 드로잉, 회화와 조각작품을 남겼다. 자유와 저항정신의 대명사인 바스키아는 현재까지도 시각예술뿐만 아니라 새로움을 대변하는 문화 전반의 아이콘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댓글 남기기

이메일은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입력창은 * 로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사이트는 스팸을 줄이는 아키스밋을 사용합니다. 댓글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알아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