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이스선+,Talk & Family 정종기 개인전

2004년 정종기가 <그들만의 언어>로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을 수상했을 때 많은 사람들은 참신한 작가의 출현을 반겼다. 두 청소년이 바닥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모습을 그린 이 유화작품은 그가 입시에 내몰려 꿈을 잃어버린 청소년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인물의 그림자는 학업에 시달리는 그들의 고충을, 바람이 부는 듯한 바탕은 풍진 세상을, 그리고 짐수레는 그들이 감당해야할 무거운 짐을 암시한 것으로 그의 눈에 비친 청소년들의 현실을 대변했던 작품이었다.

그 후로도 정종기는 소외된 현대인들을 주제로 작품을 꾸준히 발표해왔다. <그들만의 언어>가 우울한 인물을 모델로 한 것처럼 그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무언가 걱정에 사로잡혀 있거나 외부세계와 고립되어 있다. 대화나 소통은 찾아볼 수 없고 각자 개체로 고립된 섬처럼 존재한다. 침묵은 대화의 지고라는 말이 있지만 그의 작품에 흐르는 침묵은 차라리 관계단절에 더 가깝다. 또한 작품에서 보여지는 인물의 뒷모습은 소외와 고독의 감정을 한층 고조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익명성을 띤 그림의 주인공은 지금 깊은 어둠속에 갇혀 혼자 고독을 움켜잡고 야위어만 간다. 희망의 불빛이 점차 희미해지는 동안 그는 시름과 착잡함에 깊은 한숨을 내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품을 보면 인체의 뒷모습을 자주 엿볼 수 있는데 2008년 아트파크 개인전에서 그런 측면이 더욱더 두드러졌다. 우두커니 무언가를 응시하는 등장인물의 시선이 어디에 맺혀지는지 불분명하다. 바라보는 지점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멀뚱멀뚱 먼 산을 쳐다볼 때처럼 그의 심정이 착잡하다는 것을 반증한다. 우리는 흔히 생각이 복잡하거나 우울할 때 허공을 바라볼 때가 종종 있는데 바로 그런 동작을 제시하는 셈이다.

 

“익명의 도시인들의 삶의 모습을 화면에 재구성하여 문명화된 현실속에 감추어진 인물의 일상을 표현, 개인의 존재가치와 삶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개인적이고 닫힌 세계에 사는 현대인의 얼굴은 뒷모습으로 나타난다.”(작가노트중에서)

 

이번 개인전에서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나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익명의 대중’에서 ‘가족’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새롭다. 그림을 보면 거리를 걷고 있는 모녀,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엄마, 어딘가를 응시하는 여인, 아빠는 아이를 안고 엄마는 두 손으로 햇살을 가리는 장면, 유모차의 아이를 보살피는 여인 등이 등장한다. 인물과 동작은 각각 다르지만 화면의 주인공들은 서로 정답게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다. 이번 작품에서 보듯이 단절된 대화가 가족속까지 파고들었음을 감지할 수 있다. 작가는 서로의 속마음을 나누지 못하고 자기의 세계에 집착하면서 가족관계마저 소홀히 하고 있음을 환기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의 작품타이틀을 <토크-가족>이라고 붙임으로써 역설적으로 심중에 있는 바람을 나타내고 있다. 그의 그림은 파스텔톤으로 산뜻한 분위기를 간직하고 있으나 작품내용은 쓸쓸하고 공허하다. 반면 등장인물은 예쁜 머리핀과 머플러,가방,귀거리 등을 하고 있으며 우아하고 근사하게 꾸며져 있다. 이런 이미지들은 고독한 현대인의 기표를 상징하는 것으로 화려한 기표 뒤에는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 매달린 현대인이 자리한다.

사실 가족해체는 사회적으로 매우 심각한 일이다. 그런데 그런 광경을 보고 있는 우리의 마음은 불편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토크>라는 표제로 보아 종국에는 모든 사람들이 ‘토크’의 단계로 돌아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소망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들은 언제나처럼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지금 미로에 갇혀있는 사람들처럼 매우 혼란스러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바탕의 색깔들은 어둡고 칙칙하기 보다는 영롱하고 어떤 기다림에 부풀어 있다. 바로 여기서 그림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암담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이제는 밝고 긍정적인 어떤 전조(前兆)를 암시하는 것들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으니 말이다. 이 답답하고 괴로운 현실 또한 지나가리라는 암시를 통해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려는 작가의 의도를 읽어볼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우리 사회의 대화단절을 신랄하게 꼬집으며 그것이 가족 공동체까지 파고들었음을 지적한다. 아무 것도 없는 황량한 세상속에 방치되어 있는 듯한 모녀는 보는 사람에게 짠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킨다. 그것이 그가 익명화된 인간의 소외를 주제로 삼았을 때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며 절박해 보인다. 그는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를 사실주의적 기법으로 솔직하게 제시함으로써 당신이라면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해나갈 것인지 질문하는 것같다. 남의 속도 모르고 삶의 상처를 건드리는 것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겠으나 정작 그가 말하려는 것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화목한 세상에 대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용혜원 시인의 작품중에 “고독처방”이란 시가 있다. “사랑은 무지한 잣대로 휘두른 상처에/자신을 비워낸 깊이만큼 어루만져/고독이란 이름의 몹쓸 병으로부터/평생 면역을 제공하는 백신입니다.” ‘사랑의 백신’을 맞으면 어떤 마음의 병도 치유할 수 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는 이 시가 말해주듯이 상대에 대한 관심과 배려, 따듯한 말 한마디가 상대방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움직이게 하며 결국에는 거리를 좁히는 촉진제가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초월하고 혼란한 상황속에서 희망적인 방향으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독이란 몹쓸 병’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랑의 백신’을 맞는 길 뿐이다.

정종기는 심각한 관계단절의 문제를 지적하고 있지만 해법을 제시하지 않은 채 단순히 문제를 노출하는 차원에 그치지 않는다. 단절과 소외에 의해 마비된 사회에서 벗어나는 길은 앞에서 말한, 새로운 창조력을 체험하려는 적극적인 삶의 실험의지에 달려 있는 셈이다. 결국 정종기의 작품은 사랑스러운 가족관계의 회복에 대한 희구로 요약된다고 할 수 있다. 반어법이 그것의 중요성을 한층 북돋아주고 환기시키는 장치로 기능하고 있는 셈이다.

 

■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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