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가슴 훔친 색채화가- 진양욱 판화 특별 기획전


<늦가을> 실크 스크린, 73×60.6cm

작가  진양욱 Yang-Wook Jin
제목  ‘신의 가슴 훔친 화가’ 진양욱 판화 특별 기획전
기간  2012.5.30wed∼6.12tue
장소  리서울 갤러리
문의  02-720-0319
시간  10:30~19:00
서울 종로구 인사동 23-2 www.leeseoul.com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터치와 자연의 생명력이 깃든 색채 표현으로 천재적 작품 세계를 펼치다 갑자기 타계한 남도 화단의 거봉 진양욱 작품 판화 특별전이 5월 30일부터 6월 13일까지 인사동 리서울 갤러리에서 열립니다. 진양욱 선생은 초대 조선대 미대 학장을 역임한 한국 서양화 2세대 중 선두 주자로써 서구 인상파와 사실주의 화풍을 한국적 미감으로 승화시킨 작가였습니다.

작품이 가진 강렬한 색채적 특성으로 최고의 색채화가로 평가됩니다. 색면과 색면이 자아내는 순도 높은 색채의 향연은 진양욱 회화의 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연이 가진 원색의 색가(色價)를 최대한 발휘하면서 원색 상호간의 보색적인 대비, 한색과 난색의 대조효과를 살린 풍부한 색채 조형으로 사실성과 환상성이 조화롭게 나타납니다.

특히, 이번 판화 작품은 진양욱 회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작품들로 엄선해 최고급 수준의 판화로 탄생시킨 작품들로 한국적 미감과 서정성이 깊숙이 배여든 명작들로 구성했습니다. 소중한 작품이 전시되는 이번 전시에 많은 관심 바랍니다.

<작가와 작품 소개>
진양욱(晋良旭 1932-1984, 전북 남원생, 조선대 대학원 졸업, 조선대 교수 역임)


<황소> 실크 스크린, 73×60.6cm

한국적 서정성 표현한 최고의 색채 화가

진양욱의 그림은 인상주의에서 출발했다. 그 뿌리는 오지호의 구상주의에서 출발한 후기 인상파였다. 가난에서 어린 시절의 뼈대가 굵었듯 그의 그림은 단단한 데생력을 기반으로 시작됐다. 그 위에서 임직순이라는 색채의 스승을 만나 한걸음 더 성숙한 것이었다.

진양욱은 1932년 전북 남원에서 태어나 1955년 3월에 조선대학교 미술학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스승 오지호를 만나 인상파와 자연주의 경향 아래서 사실주의 미술을 공부했다. 인상파의 발원지는 프랑스였고, 그곳에서 활동하는 화가들이 이뤄낸 하나의 경향이었다.

인상주의는 태양의 빛과 그것을 받아들이는 시각의 예술이었으며, 그 때문에 ‘외광파(外光派)’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이들은 아틀리에를 박차고 야외로 뛰쳐나가 태양빛 아래서 풍경을 그리는데 몰두했던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인상파는 일본 도쿄 미술학교 서양화과의 구로다 세이키, 오카다 사부로스케 등에 의해 일본 인상주의의 양식으로 이어졌다.

오지호는 가와바타 미술학교시절 ‘후지시마 다케지’의 교실에서 공부했는데, ‘후지시마 다케지’는 일본 외광파의 선구적 화가 ‘구로다 세이키’의 영향을 받은 화가였다. 이들은 처음에는 낭만주의적인 문학성을 띈, 장식성이 강한 그림을 그렸다. 이후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지에서 수학한 후 직관과 데생력을 토대로 대상을 단순화시키고 거친 붓질로 순도 높은 원색을 즐겨 사용했다. 이런 화풍을 오지호는 남도의 빛과 색채로 승화시켰고, 그 영향 아래서 양욱의 초기미술은 시작됐던 것이다.

이후 오지호가 교단을 떠나고 1960년 임직순이 부임했다. 이때부터 양욱은 다시 새 스승 임직순의 영향 아래서 그림을 그려나갔다. 임직순은 일본 유학시절 그의 스승 ‘하야시 다케시’ 의 영향을 받았다. ‘하야시 다케시’는 루오를 숭상하는 야수파의 대가였다. 임직순 역시 루오의 그림을 좋아해 루오 전시회가 열릴 때면 하루 종일 전시장에 머물곤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더욱이 임직순은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던 피에르 보나르의 영향을 받아 색채주의를 자신의 화풍으로 승화시켰다.

양욱은 이런 두 스승의 영향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인상파에서 시작해 야수파를 거쳐 색채주의까지를 섭렵하며 자신의 미술세계 기반을 다져나갔던 것이다. 즉 프랑스 외광파와 야수파, 그리고 색채주의까지를 두루 아우르며 자신의 세계를 재창출하기 위한 바탕을 다졌던 것이다. 이런 미술의 기반 아래서 몰두했던 양욱의 주된 모티브는 자연이었다. 그는 국전ㆍ도전ㆍ개인전을 통해 작품을 발표했는데 몇몇 정물을 제외하면 거의가 풍경화였다.

양욱의 작품생활은 1955년 조선대입학시부터 1984년 작고 시까지 총 30년이다. 작가의 경향을 시간대로만 분류하는 것은 상황에 따라 미세하게 변모하는 작가의 경향을 관찰할 수 없는 단점이 있다.

그러나 진양욱의 경우 시간대별로 변화가 뚜렷하고 흐름이 자연스럽게 읽혀지는 작가다. 그러므로 시기별로 구분해보자면 1955~1963년까지를 제 1기인 인상주의 학습기로, 1962~1977년을 제 2기인 색채주의 도입기로, 1978년부터 세상을 뜨기까지인 1984년까지를 제 3기인 동양적 사실주의 완성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 인상주의 학습기

<홍도> 실크 스크린, 73×60.6cm

1955년 조선대에 입학한 양욱은 당시 남도미술의 대부 오지호의 지도를 받으며 착실하게 사실주의 기법을 익혀나갔다. 그 시절 오지호가 늘 강조하던 드로잉에의 철저한 몰입은 훗날 그의 미술세계를 이뤄나가는 중요한 근간이 되었다. 그의 그림이 사실주의에서 색채주의로, 다시 풍경의 내면주의로 나아가는데 언제나 중심이 되는 것은 그때 오지호에게서 익힌 정교하고 직관적인 데생력이었다.

그가 추상에 가까운 풍경의 내면적 색채주의로 몰입해 들어가면서도 끝까지 사실적 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은 이런 오지호의 가르침이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양욱의 그림 밑바탕에는 빛의 변화를 관찰하는 외광파의 사실주의 기법이 언제나 뼈대가 되고 있는 것이다. 오지호는 그의 순수회화론에서 “예술은 생명의 본성의 실재한 모양이오. 그리고 그것은 가장 순순한 모양이다.”라고 천명하곤 했고, 사실주의를 외면한 미술은 도안이라고 까지 비하 했던 것이다. 이런 영향에서 양욱은 끝까지 벗어날 수 없었다. 이처럼 최초의 스승인 오지호의 영향은 언제나 화면의 뼈대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그의 배경을 평론가 김인환씨는 이렇게 지적하고 있다.

“활화산처럼 타오르는 터치로서 명쾌하고 빛나는 환희의 세계, 대상으로부터 탈실된 충동적이고 현란한 색채의 세계가 전개된다. 대상형태, 대상색의 제약에서 벗어나면서 이 작가의 풍경화는 자유분방한 활기와 생명력과 강력한 표현에 접근된다. 실상 ‘풍경’이라는 모티브를 확인할 수 있는 유기적 요소들을 제거한다면 그의 작품은 추상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왜 그는 구상성에 연연하는 것일까. 작가 자신이 직접 견해를 밝히고도 있거니와 그가 살아온 호남이라는 고장의 특성과 그 성장배경이 아무래도 파격적인 전환을 허용치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화가로서 자라온 풍토와 그곳의 기질을 벗어나기란 쉽지 않듯 양욱은 남도의 사실적 기풍을 끝까지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제 2기 색채주의 도입기

1961년 오지호의 후임으로 임직순이 조선대에 부임했고 조교이던 양욱은 63년 대학원을 마친 뒤 전임강사가 됐다. 임직순이 부임한 이후 조선대 미술학과는 제 2 부흥기를 맞았다. 오지호가 닦아놓은 인상파의 사실주의 기반 위에 신묘할 정도의 색채주의가 남도 화단의 본산 조선대 미술학과에서부터 범람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주의의 거두가 퇴진하자마자 숨 가쁘게 색채주의가 닥쳐온 것이다. 아직 오지호의 사실주의조차 제대로 성숙되지 못한 상황에서 임직순의 등장은 남도화단에 혼란을 불러 일으켰다.

임직순은 남도의 태양빛 아래서 물을 만난 고기처럼 황홀 찬란한 그림들을 휘두르듯 그려냈으며 남도화단은 연신 감탄의 비명을 지르기에 바빴다. 그때부터 남도의 화가들에게 임직순은 하나의 목표가 되고 말았다.

임직순의 작품은 해마다 국전을 강타했으며 그 반향은 남도화단을 긴장으로 몰아넣었다. 더구나 한 학교에서 함께 근무하는 양욱은 긴장과 감탄을 연발하며 임직순의 색채를 연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여름> 실크 스크린, 73×60.6cm

그때부터 학장인 임직순을 앞세워 황영성ㆍ김종수 등과 함께 양욱은 주말이면 거의 주변 근교로 나가 그림을 그려댔다. 그는 그 무렵 더욱 깊고 내밀히 색채를 연구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양욱은 자연의 대상세계를 주관적으로 해석해 다소 변형을 가하는 추상적 화법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풍경을 다루는데도 긴밀한 색면의 혼합으로 다채로운 색채의 울림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3차원적인 원근법을 무시하고 2차원적으로 화면을 단순화하는 기법도 이런 울림의 효과를 가져다주었다. 색감의 질량과 형태를 번지듯 표출해냄으로써 감각적인 화면구조를 성립시키는 조형 방법도 터득하게 되었다.

그는 마침내 자신만의 번지고 울리는 색채를 만들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이런 것들은 사실주의에서 한 걸음 나아가 색채화가로서 그를 거듭나게 해주었다. 이때 그린 작품의 가장 핵심 요소는 단연 다색성이었다. 다채로운 색채로 연결되는 색의 띠와 각각의 색면들이 자아내는 순도 높은 울림에 있었다. 환상적이면서 장식적이기도 한 화면은 색채의 교향악적 울림처럼 황홀감을 자아내주었다. 풍경의 내면울림을 그는 색채의 번짐과 마티엘 기법으로 보여주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제 3기 동양적 사실주의 완성기

양욱은 1977년 9월 26일 김흥수 선생이 재직하던 필라델피아의 ‘Pennsylvania Academy of the Fine Arts’로부터 연구교수로 초빙 받았다. 그해 12월에 출국해 그곳의 기숙사 옆을 흐르는 인디언 강에서 밤마다 그 강의 풍경들이 우는 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자연의 내면울음이었다. 달이 뜨면 풍경들은 더욱 깊고 은밀한 소리로 울어댔다. 바람이 불면 강가의 나무들은 달빛 그림자를 드리운 채 우주적 울음을 울었다.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가 이렇게 생명감으로 외롭고도 환희롭다며 안으로 울고 있는 것이었다. 강가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문득 자신도 내내 가슴으로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너무 생명의 외부만을 그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태양빛 아래 환히 드러나는 풍경들의 외형만을 그렸을 뿐, 밤의 희석된 공기 아래서 고요히 울음을 나부끼고 있는 풍경의 내면은 너무 외면해 왔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우주적인 것들은 때로는 외로움으로, 때로는 삶의 환희로, 저마다 다른 모양으로 울고

<필라델피아> 72×90.5cm

있다는 것을 강가를 내려다보며 깨달았다. 마침내 서구의 외광파적 기법에만 집착해온 자신의 어리석음에 한줄기 빛이 비춰오고 있음을 느꼈다. 이내 그는 모든 사물과 풍경의 내면울음을 보여주어야만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동양적 사실주의를 완성하는 일만이 그가 해내야할 일임이 그 순간 뇌리에 각인됐다. 그는 그 즉시 작업실에 화판을 펼쳐놓고 그림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림의 내면이 어떻게 변해가는 지를 관찰하기 위해 캔버스에는 일일이 번호를 매겼다. 그리고는 그것들을 순서대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몇 달이 지나자 그의 작업실은 내면의 울음이 한꺼번에 타오르는 동양의 수풀림으로 변하고 말았다. 마침내 그는 자신이 염원하듯 풍경의 내면을 표현하는 동양적 사실주의를 완성해내는데 성공한 것이다.

신의 가슴 한자락을 훔쳐내는데 성공한 그는 너무 환희에 들떠 과도하게 비밀을 누설해버린 것일까. 환희의 정점에서 신은 더 이상 그의 진입을 용납지 않았다. 1984년 12월 16일 오후 2시, 장성군 북하면 내장사에서 백양사로 가는 국도에서 자동차 사고로 생을 마감하며 신의 바리케이트는 내려지고 말았다. 너무 빠른 진입은 역사를 거스르는 일이라며. 그러나 가장 첨예하게 신과 겨루는 자는 예술가일 뿐, 그가 이뤄낸 남도의 내밀한 사실주의는 붓끝에서 붓끝으로 면면이 이어지며 오늘도 신과 경주하고 있는 것이다.   김현석 (시인ㆍ문예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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